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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이슈

6.25전쟁 70주년, 한반도는 여전히 휴전상태 [한국전쟁/원인/개요/결과]

by J.Daddy 2020.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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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2020년 6월 25일은 6.25 전쟁 7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왜 우리는 같은 한반도에서 같은 민족들에게 총칼을 겨누고 싸워야 했을까요?

아직도 한반도는 전쟁이 '휴전' 상태일 뿐,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남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태이죠.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고, 언제까지 이렇게 긴장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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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망 후,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을 분할한 미국과 소련 군정에 의해 

한반도는 잠정 분단 상태가 됩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으로 유엔 감시 아래 자유총선거를 실시하여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1948년 5월 북한은 조선 헌법은 선포한 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출범하죠. 

 

6.25 전쟁의 원래 명칭은 한국전쟁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벌어진 한반도 전쟁입니다. 

이 당시는 남한과 북한의 분단 정부가 서로의 체제를 반국가 단체로 규정하고 

각각 북진 통일과 남진 통일을 주장하며 군사 충돌도 마다하지 않던 시기였죠.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얻어 빠르게 군사력을 키웠고, 남한보다 군사력에서 앞서 있었습니다. 

더구나 1949년 한 해 동안 미군이 한국에서 모두 철수한 데다 중국 공산당이 중국 전체를 장악하였고, 

소련이 원자 폭탄을 개발하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며 한반도 주변 정세는

서로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4월과 5월 소련과 중국을 차례로 방문하여 전쟁 의사를 밝혔고 

두 나라로부터 지원 약속을 받게 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군에 비해 병력과 장비에서 열세였던 남한군은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하게 되었고, 

유엔은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안전보장 이사회를 소집해 북한군에게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으나 북한은 이 결의를 무시합니다. 

결국 유엔 안보리는 북한군의 침략을 격퇴시키기 위하여 남한에 모든 지원을 하겠다는 

'6.26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이로 인해 16개국이 전투부대를, 6개국이 의료 또는 시설 지원을 하러 한반도로 오게 됩니다.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는 합동참모본부에 인천 상륙작전을 제안했으나 이를 위한 군사력의 분산과 

인천 지형이 상륙 작전을 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했습니다. 

그러나 맥아더는 북한군이 부산을 점령하기 위하여 그 지역에 집중적으로 병력을 집결하기에 

인천 지역의 방어가 소홀하고, 한국의 수도 서울을 빠른 시간 내 탈환하는 것은 

군인과 민간에게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대통령의 허가를 받았죠.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미 제1 해병사단과 제7사단, 한국 해병대로 구성된 병력으로 

월미도에 기습 상륙하고 그다음 날 인천을 함락시킵니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쟁의 흐름은 단번에 뒤바뀌게 되죠. 

이렇게 시작된 국군과 유엔군의 대반격으로 9월 28일 서울을 탈환했고, 

10월에는 평양을 넘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게 됩니다. 

 

하지만 11월 중공군이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으로 맞서자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1월 4일에 38선 이남으로 철수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1.4 후퇴'입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총력을 다해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다시 북진하게 되고, 

38선을 사이에 둔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후,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과 판문점에서는 휴전 회담이 열렸고 

군사 분계선 설정 문제를 비롯하여 휴전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협정, 전쟁 포로, 양측 관계 정부에 대한 건의 문제 등 

4개 의제를 토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회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했고 장기간 설전이 벌어졌죠.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시기에는 전선이 소강상태를 유지했으며,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곤 했습니다. 

 

회담 천막과 전장 사이를 오가는 상황이 2년여 동안 지속되던 이때에 전장에서는 수많은 목숨들이 쓰러졌습니다. 

피의 능선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저격 능선 전투, 금성 전투 등에서 수많은 인명 손실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때로는 중요한 고지를 두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주인이 바뀌는 혈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중공군, 북한군 대표가 휴전조인문에 서명함으로써 

정전협정이 체결되었고, 3년여간의 길고 길었던 전쟁이 멈추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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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으로 인해 입은 수많은 인명 피해와 경제적 타격 등은 남북한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이 되면서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죠. 

하나의 민족이 이념의 갈등으로 땅을 나눠 살면서 70년 동안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고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지 몇 년도 채 되지 않아 발생한 이 전쟁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죠.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제는 같은 민족끼리 그런 잔혹한 전쟁을 벌였다니,,

한국인만 해도 10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온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들은 한반도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익숙해져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현재도 세계의 각국에서는 한국을 위험국가로 생각하고 있고 

한국에 여행을 간다고 하면 친구가 가족들이 걱정을 한다고 합니다. 

제가 외국에 갔을 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늘 받는 질문이, 

South or North?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남한과 북한의 관계로 보이지만, 

언젠가 아주 먼 훗날 38선이 사라지고 하나로 합쳐지는 날이 올까요? 

통일이라는 것에 대한 찬반 여론 또한 엄청날 것으로 보입니다만,,

독일 또한 같은 일을 겪었고 열심히 이겨내고 있죠. 

 

6.25 전쟁으로 물리적, 정신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은 분들과 

전쟁 용사들에게 감사와 위로를, 그리고 우리를 도와준 수많은 국가들에게 감사하는 하루를 보내야겠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나마 발전된 국가를 만들어냈고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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