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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운동 40주년 [전두환 만행/민주화운동/추징금]

by J.Daddy 2020.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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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5월 18일, 5·18 광주 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요즘 세대들은 오래 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할 수 있겠지만, 

이제 겨우 40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해결이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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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면 전국의 대부분 대학교들은 다양한 축제를 개최하지만 광주광역시의 어느 대학교도

5월에는 축제를 개최하지 않습니다. 

지자체 역시 마찬가지죠. 

1980년 광주의 5월은 너무나 슬프고도 아팠기 때문입니다. 

 

유례없는 독재를 지속하던 박정희 정권이 1979년 10.26사태로 무너지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많은 국민들은 긴 세월동안 억압당한 참된 민주주의가 마침내 실현되리라는 기대에 차 있었지만, 

이러한 바람이 무색하게도 같은 해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사관학교의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반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모두 살해하고 군권을 장악합니다. 

 

정계가 혼란에 빠진 사이, 전국의 대학생들은 학생회 부활과 학원민주화 투쟁 등 

민주화 운동을 벌이며 학교의 담을 넘어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을 외치던 시위대가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고 스스로 해산하자

때를 기다렸던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대도시에 군을 투입해 대학생을 포함한 민주화운동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의 충돌을 시작으로 계엄군은 광주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했고, 

19일에는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해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하지만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200여대의 차량 시위대와 함께 금남로에 모여 

정부의 폭력을 규탄했습니다. 

그러나 계엄군과 경찰을 광주를 완전히 고립시킨 뒤 전남도청에 모인 광주 시민을 향해 총을 쏘고 

전남도청을 사수하는 시민군을 모조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심지어 살해한 후 시체들은 암매장 하기도 했으며 지금까지도 시신조차 찾지 못한 유가족들의 고통은 이어집니다.

 

자국 국민을 학살하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시민군이 되어 계엄군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해 광주 시내 병원이 온통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지만, 

의약품을 나누고 헌혈 행렬에 동참하며 질서를 유지하고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철저하게 고립된 상황에서도 공동체를 이루어 치안을 유지하고, 부당한 국가권력에 맞서 

최후까지 항쟁을 이어갔습니다. 

 

국가 권력이 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이 사건은 이름도 없이 '광주사태'로 불려 오다가, 

1988년에서야 비로소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되고 1997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며 제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대법원은 신군부의 12.12. 군사 쿠데타부터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진압 과정을 군사 반란과 내란죄로 판결했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분노와 정의를 상징하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한편 온라인에서는 과거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학살 사태에서 살아남은 한 여성이 국회의원에게 

질문을 받은 장면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 이 여성은 1980년 5월 23일 계엄군의 총격으로 버스에 타고 있던 

시민 18명 중 17명이 사망했던 '주남마을 버스 총격사건'의 생존자였습니다. 

이 여성은 과거 국회 청문회에 나와 당시 상황에 대해 생생하게 증언하였는데, 

당시 한 군인이 대검을 들고 오더니 "너도 유방 하나 잘리고 싶냐"는 협박을 했다고 합니다. 

이때 한 국회의원이 했던 질문은 더 어이가 없습니다. 

"결혼은 했느냐, 기왕 결혼하려면 경상도 남자와 결혼해서 이 쓰라린 상처를 아물게 해라.

증인은 역사적인 그런 사명, 그런 씨앗을 한 번 심어줄 용의가 있느냐." 

뭐죠..? 비읍 시옷인가요..? 

이 질문을 했던 유수호 의원은 현 미래 통합당 유승민 의원의 아버지로,

대구 서구 중구에서 13대와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입니다. 

 

전두환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실질적 발포 명령자로 지목되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부인하고 있죠. 

그의 전 비서관이었던 민정기씨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매년 사죄하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해 사과를 하라는 것이냐. 

할 얘기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당시 작전 문제에 대해서는 이희성 당시 육군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 

본인의 책임이라고 상세히 언급했다. 

이미 국회 청문회 등에서 입장을 표명했으며 양민에게 무차별 발포 명령을 했다는데 대해 사죄를 요구한다면 

사실이 아닌데 어떻게 사죄를 하라는 것인가. 

경찰과 계엄군이 시위진압에 지쳐 쉬고 있다가 시위대 버스와 장갑차에 깔려 죽었다. 

동료들이 눈앞에서 죽어 나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는가. 

지휘관이 사전에 발포를 명령한 상황이 아니었다. 

 

전두환은 대통령 재임 시절에 나랏돈 거액을 빼돌려 집을 재건축하기도 했으며

당시 재건축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음식물 엘리베이터 설치하는 비용에 30억 원가량이 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 비용이면 압구정동에 있는 중형 아파트 30채를 살 수 있었죠. 

 

전두환은 퇴임 후 사무실 집기 구매 명목으로 정부 예산 900만원(당시 5급 공무원 초봉은 26만 원)을 받아

고가의 책상, 의자, 응접실 세트, 옷걸이, 공기 정화기, 시계 등을 사들였으며 

본인의 집에 사무실을 차리겠다는 이유로 보증금 2100만원, 월세와 관리비로 매달 280만 원을 국가에 청구했습니다.

자기 집을 자신한테 세를 놓는 수법으로 세금을 빼먹은 것이죠. 

 

5공 비리, 광주 학살에 대한 국회청문회가 진행 중이던 1988년 11월 23일에 전두환은 기자회견을 열어 

연희동 집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으나 지금까지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국가에 내야 할 추징금만 1005억원에 달합니다. 

그는 고액 상습 체납자로, 국세 30억 9천만 원과 지방세 9억 5천만 원을 체납했습니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전두환에게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원을 내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다른 신군부 가담자들도 함께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불과 8개월만에 그들은 사면을 받았습니다. 

 

현재까지 전두환 일가에게 환수한 추징금을 제외하면, 아직도 1005억원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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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일가는 고가의 부동산들과 알짜배기 기업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장남 전재국씨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의 저택, 경기도 파주 소재의 건물 2채를 소유하고 있으며 

사업체로 시공사, 리브로, 북플러스, 음악세계 같은 출판 관련 회사를 운영 중입니다. 

스타일끼사와 파프리카 미디어 등 문화 콘텐츠 사업도 벌였죠. 

부동산 개발에도 손을 대 경기도 일산 주엽에 위치한 스타몰 사업으로 최소 100억 원의 수익을 낸 적도 있습니다. 

전두환 일가의 사업은 자녀를 거쳐 손주들에게도 세습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국민들을 학살하고,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은 전혀 자신에게 없음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으며

전 재산이 29만원이라면서 뻔뻔하게도 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고령으로 정신이 깜빡깜빡 한다면서 골프도 치러 다니죠.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대로 천벌을 받을겁니다.

아니, 받아야 합니다. 

일단 추징금부터 얼른 받아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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